천경자 화백 1924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고, 일본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조선미술전람회에서 , 를 출품해 연속 입선하면서 일찍이 화가로서 역량을 인정받았다. 특히 1952년 뱀 그림 를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 전통적인 동양화 기법을 벗어나 문학적, 설화적 면을 강조해 여인의 환과 꿈·고독을 환상적인 색채의 화풍으로 구사했다. 특히 세계일주를 하면서 제작한 여행풍물화는 천경자만의 그림 에세이라는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1955년 으로 대한미술협회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으며, 은관문화훈장, 예술원상, 3·1문화상, 서울시 문화상, 오월문예상 본상 등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 1954~1974년 홍익대학교 교수로 재직했으며, 예술원 회원, 국전운영위원, 미술대전운영위원 등을 지냈다. 1998년 소장하고 있던 전 작품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여 ‘천경자실’에 상설 전시되어 있다.

1924
11월 11일 (음력 10월 15일) 전남 고흥군 고흥읍 서문동에서 부친 천성욱과 모친 박운아의 1남 2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더읽기

부친은 군청에서 일했으며 모친은 일찍부터 서예와 묵화를 배워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여동생 옥희와 남동생 규식과 함께 고흥의 봉황산 자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31
고흥보통학교 (현 고흥국민학교의 전신)에 입학.더읽기

보통학교 입학 전 외조부는 손녀 천경자를 지극히 이뻐해 매일 밤 <심청전> <장화홍련전> <삼국지> <수호지> <춘향전>을 얘기해 주었다. 어린 천경자의 문학성은 그렇게 일깨워졌다. 또한 외조부로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어려서부터 그림에 특별한 소질을 보였다. 보통학교 시절 교정에서 열린 박람회장에서 소록도 나병원 간호부로 있던 선배 ‘길례언니”를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길례언니는 그의 연작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여인이 되었다.

1941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현 동경여자미술대학)에 입학.더읽기

 광주 욱고녀를 졸업하고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현 동경여자미술대학)에 입학. 그곳엔 우향(雨鄕) 박래현이 일 년 먼저 유학 와 있었다. 당시 입체파, 야수파가 유행했던 서양화보다는 곱고 섬세한 동양화가 생리에 맞아 전공으로 택한다. 이 때부터 경자(鏡子)란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함. 본명은 옥자(玉子)이며 잠시 모친의 아호인 연사(蓮史)와 본명을 합처 옥사(玉史)란 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모자라는 학비를 쪼개 영화를 보고 책을 사 읽었다. 후일 ‘오로지 가난한 나를 달래 준 등불은 싸구려 영화관에 가서 흘러간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림이 있는 나의 자서전 54페이지>

1942
제22회 조선미술전전람회 에서 작품 <조부상>으로 입선.더읽기

 학교 수업외에 인물화가 고바야가와 기요시 선생에게 사사했으며 인물화 단체인 청금회전에 입선하여 회원으로 활동했다. 제22회 조선미술전전람회 에서 작품 <조부상>으로 입선.

1943
제23회 마지막 조선미술전람회에 외조모를 모델로 그린 졸업작품 노부를 출품하여 입선했다.

1944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 일본화과를 졸업하고 귀국했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구하기 어려웠던 여객선 표를 구해준 인연으로 동경 유학생 이형식을 만나 결혼한다.

1945
장녀 혜선 (어려서는 남미란 이름을 사용)이 태어남.

1946
모교인 전남여교의 미술교사가 되었으며, 그 해 학교 강당에서 첫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1949
광주사범학교로 옮겨 일시 재직했다. 6월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경향신문>, <신경향>, <문예> 지 등에 전시평이 실림. 장남 남훈(후닷닷)이 태어남.

1950
6.25 동란 전후 뱀에 매료되어 광주역 부근의 뱀집을 찾아다니며 스케치에 열중했다. 남편 이형식과 결별한다.

1952
부산 국제구락부 개인전을 열었다. 전시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특히 뱀 그림 <생태>가 화제를 모았다.더읽기

작품 “생태”는 20대 후반 작가의 불행과 절망, 가난 속에 태어난 작품이다. 6.25 전쟁중 삶의 끈질긴 의지와 의욕을 담았다.  작가는 ” 이런 판국에 어찌 찔레꽃 향기나 찾는 시심 깃든 뱀 따위를 그리겠는가? 차라리 수십 마리의 뱀으 화면에 집어 넣음으로서 이 슬픔을 극복하고, 그럼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고 회고했다.

피란지 부산에서 열렸던 미술협회 전시회에서 처음 발표되었고 주최측은 처음엔 대중의 반응에 자신이 없어 전시장이었던 다방의  주방에 그림을 숨겨두었었다.
그러나 젊은 여자가 뱀을 그렸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 그림을 보기위한 관람객들이 연일 몰려들어 밤 늦도록 문을 닫을 수 없을 정도였다.  피난지 부산에 내려와 있던 많은 화가, 문인들로 부터 찬사를 들었다. 부산화단에서 김흥수, 김환기, 이마동, 정규, 윤효중, 김정숙, 권옥연, 작가 오상순등과 교유함.
이무렵 첫 수필 “신부리”를 <문예>잡지에 발표한다.

1954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임명되어 서울로 올라왔다. 전남일보 기자 김남중과의 사이에 둘째 딸 정희(미도파)가 태어남. 김남중은 이미 부인이 있었다.

1955
대한미협전에 작품 <정>을 출품하여 대통령상을 수상했다.더읽기

첫 수필집 <여인 소묘 >(정음사)를 발간. 이후 여러 권의 수필집을 출간하여 솔직하고 감수성 넘치는 문체와 소재로 사랑을 받았다. 국전에 칸나와 칠면조를 그린 병풍을 출품하여 특선했으나 이후 58년까지 채색화를 배격하는 화단의 움직임에 저항하여 출품하지 않았다.

1957
10월에 동화백화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더읽기

백양회 창립멤버로 활약하다 모던아트협회 멤버가 되어 국립도서관회장에서 발표전을 가졌으며 회원으로 박고석, 이규상, 유영국, 한묵, 황염수, 정규, 김경, 문신 등이 활약했다. 막내 종우(쫑쫑)가 태어남.

1959
작품 <전설>, <두 사람> 등을 제작함. 이떄부터 사실적인 화풍이 변화되어 초현실적인 화면에 시적인 이미지들이 환상적으로 등장하는 화풍으로 바뀌었다.

1960
수필집 <유성이 가는곳> (영문각)출간. 한국일보의 연재소설 <사랑의 계절>( 손소희 작)의 삽화를 그림. 수필집 <유성이 가는곳> (영문각)출간.

1961
국전 추천작가가 됨

1962
필리핀 초대전에 출품. 더읽기

누하동 집에서 옥인동으로 이사한다. 몇년 후 이층에 방을 들여 소원하던 화실을 마련한다.

1963
11월 동경 니시무라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아사히>, <도오쿄>, <산케이>등의 신문에 개인전 기사가 실림.

1964
5월 문예상 본상을 수상했다.

1965
10월, 신문회관에서 제8회 개인전을 열었다. <여>, <꽃>, <석양머리>, <화무>, <초혼> 등 22점 출품. 12월 일본 동경의 이토화랑에서 두번째 일본전을 열었다. <여상>지에 <언덕 위의 양옥집>이란 제목의 수필을 연재함. 이후 단행본으로 발간됨.

1966
소설가 손소희, 한말숙 등과 교유. 이 무렵을 전후하여 소설가 손소희, 한말숙 등과 교유했다. 특히 소설가 박경리와 친분이 깊었다.

1967
말레이지아 정부 초청 초대전에 출품

1969
국전 추천작가가 됨. 5월, 신문회관 화랑에서 < 도불 기념전>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숙(宿)>, <태양> 등28점을 전시함. 8월 프랑스로 가기 위해 출국했다. 더읽기

프랑스로 가기에 앞서 미국 뉴욕에서 열린 INSEA(국제미술교육자회의)에 참석하고, 제10회 상파울로 비엔날레에(작품 3점 출품)참석한 후, 남태평양의 타이티섬 등 여러 섬들을 여행했다. 프랑스에 머물면서 이탈리아 스페인 등을 여행함. 10월부터 <중앙일보>에 기행문 ‘타이티 화신 (畫信)’을 스케치와 함께 연제 (5회) 했으며, 이어 동 신문에 ‘파리 화신’을 연재(6회)함. <생태>에 이은 대표적인 뱀 그림 <사군도 蛇群圖)>를 제작했다. 

1970
4월에 9개월간의 스케치여행을 마치고 프랑스로부터 귀국하여 <중앙일보>에 ‘스페인 화신(畫信)’을 8회에 걸쳐 연재함.
9월에 신문회관 화랑에서 <남태평양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을 열었다.

1971
6월에 서울시 문화상 (예술부문) 수상. 더읽기

“14회에 걸친 개인전을 통해 독창적인 동양화 착상에 주력하고 교단에서 20여 년간 현대 동양화 창작 정신을 지도한 공적”이 인정되어 수상하게 됨. 신촌에 ‘천경자 미술연구소’를 개설함. 미술연구소는 채 일년을 못넘기고 문을 닫았다.

1972
6월에 문공부 주관으로 월남 종군기록화 제작을 위한 화가단 (단장 이마동)에 선정되어 월남에 파견된다. 돌아와150호 짜리 대작 두점등 여러 작품을 제작함. 남태평양 풍물기행으로 엮은 단행본 <천경자 남태평양에 가다>를 펴냈다.

1973
8월에 현대화랑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이탈리아 기행>, <길례언니> 등 37점을 출품했다.

1974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두 번째 세계일주 스케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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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부터 약6개월동안 아프리카를 중심으로 두 번째 세계일주 스케치 여행 떠남. 인도네시아의 발리섬을 여행한 후 아프리카의 이디오피아, 케냐, 우간다, 콩고, 세네갈, 모로코, 이집트 등을 거쳐 프랑스를 여행하면서 많은 스케치를 했다. 9월에 현대화랑에서 <아프리카 풍물 시리즈 스케치전>을 열었다. 파리여행 중 아카데미 고에스에서 제작한 유화 누드작품을 포함하여 1백 여점을 출품했다. 가을 학기부터 홍익대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품 제작에만 전념했다. 4월부터 <조선일보>에 ‘천경자 아프리카 기행’을 연재했다. 이후 기행문과 스케치 작품으로 단행본 <아프리카 기행 화문집>(일지사)를 발간함.

1975
3.1 문화상 (예술 부문)을 수상했다. 74년 아프리카 기행 화문집과 스케치전 등의 성과가 인정되어 수상자로 선정됨.

1976
1월부터 <문학사상> 지에 자서전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자전적인 그림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를 1년에 걸쳐 제작했다. 국전 운영위원이 됨. 장녀 혜선이 25회 봄 국전에서 공예작품 <옛 이야기>로 대통령상을 수상함.

1977
<계간미술>(No.3 여름호) 특집 ‘평론가들이 뽑은 동양화 10대화가’에 선정되었으며, 작품 <신기루>가 표지에 게재됨. 더읽기

한국 현대 동양화 유럽순회전 (스코틀랜드, 핀란드, 파리로 이어짐)에 출품하였다. 특히 파리에 순회되었을 때 <르 피가로>지 (78년 5월 31일자)의 전시평에 그녀의 뱀 작품이 호평 받았다. 네 번째 수필집 <한 (恨)> (샘터사)을 발간했다. 74년부터 그려왔으며 대표적인 여인상 중의 하나인 <고>가 완성되었다.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수녀 테레사> <6월의 신부>등이 같은 해에 제작되었다. 한작품에 몇개월씩 매달리는 작법으로 두텁고 밀도있는 작품의 경지가 더욱 원숙해진다.

1978
대한민국 예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매년 예술원 회원전에 작품 2~3점 출품. 9월 현대화랑에서 초대 개인전을 열었다. 더읽기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탱고가 흐르는 황혼>, <아열대 I, II>, <초원 I, II> <별에서 온 여자> 등 25점을 전시했다. 수필집 <그림이 있는 나의 자서전-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문학사상사)를 발간함.

1979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다. 2월부터 약 5개월동안 인도를 거쳐 중남미의 멕시코, 페루, 아르헨티나, 브라질, 아마존 유역등을 여행하며 그곳의 풍물을 스케치 했다. <조선일보>에 기행문을 연재함.

1980
3월에 현대화랑에서 <인도–중남미 풍물전>을 열었다. 현장 스케치 작품 60여점을 전시했다. 이후 1995년까지 개인전을 열지 않았다. 더읽기

10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4개월 동안 미국, 하와이, 영국 등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왔다. 80년대 들어 <길례언니> 시리즈와 같이 과거의 추억이나 회상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아졌고 70년대 말의 스케치 여행에서 얻은 이미지들을 가지고 작품을 제작함.

1981
11월부터 다음해 1월중순까지 미국 스케치 여행을 다녀옴. 22점의 스케치 작품을 제작. 이 스케치 여행은 둘째 딸 정희가 미국 유학중 함께 다녀온 여행이었다. 더읽기

정희(미도파)는 <길례언니>, <꽃과 여인>등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수 많은 여인상의 실제 모델이다. <경향신문>에 에밀리 브론테의 자매의 집이 있는 영국 하워드를 방문한 후 쓴 문학기행 ‘폭풍의 언덕을 찿아서’를 연재했다. 작가는 미국 키웨스트의 헤밍웨이 집, 테네시 윌리암스의 집, 볼티모어의 에드가 앨런 포우의 집, 애틀란타의 마가렛 미첼 기념관등 문학기행을 즐겨 그때 그때의 감동을 담은 스케치들을 많이 남겼다.

1982
<계간미술> (No.22 여름호)에 ‘천경자. 그의 삶과 예술’(글. 장명수)이 게재 되었으며, 작품 <탱고가 흐르는 황혼>이 표지로 실렸다. 미국의 뉴멕시코 주와 아리조나 주 기행문과 스케치 작품을 <여성중앙>에 연재함.

1983
5월부터 7월까지 미국 괌도, 북해도 등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온 후, 8월 <동아일보>에 ‘천경자 스케치 기행’을 연재했다.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수여받음.

1985
11월에 작품 <시와 원시림 속의 여인상> 연작 제작을 위해 인도네시아 발리와 자카르타를 여행했다. ‘현대미술 40년 전시회’에 출품.

1986
그림 에세이집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를 발간했다. 20여 년간의 해외 스케치 여행에서 얻은 에세이와 그림으로 엮음. 모친이 세상을 떠남. 모친은 작고할 때까지 평생을 작가와 함께 살았다.

1988
미국 중서부 지역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옴.

1990
아프리카 모로코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옴. 이목화랑이 개최한 변종하, 윤중식, 권옥연, 천경자 4인전에 출품. 94년까지 매년 개최.

1991
<미인도>가 위작 파동.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미인도>가 위작임을 발견하고 그 사실을 밝혔으나 관계 공무원과 화상들이 진품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큰 파동이 일어남. 이 사건으로 충격을 받아 절필선언을 하는 등 큰 고통을 겪었다.

1993
카브리해, 자마이카 등으로 스케치 여행을 다녀옴

1994
멕시코 스케치 여행을 다녀옴.

1995
호암갤러리에서 대규모 회고전인 <천경자 작품전>을 열었다. 초기 작품부터 최근작까지 1백여 점을 전시했다. 더읽기

지방에서 올라온 관객들도 많았으며 전시기간 내내 미술관 앞은 장사진을 이루었다. “전시가 열리는 한달동안 8만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 갔고 마지막 주말에는 하루 5천명이 입장하며 호암 미술관의 기록을 단숨에 갈아치웠다. 전시장 안에는 작가에게 사인을 받으려는 줄이 이어졌다. “ ( <천경자 평전> 최광진 저, 프롤로그, 미술문화 발행). 수필모음집 <탱고가 흐르는 황혼>(세종문고)을 펴냄.

1997
9월에 장녀를 따라 뉴욕으로 이주했다. 11월에 일시 귀국하여 그동안 자식처럼 소중히 간직해 온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다.

2002
서울시립미술관 신축 개관 기념전으로 <천경자의 혼>이 열렸고, 서울 시립미술관에 상설전시실인 ‘천경자실’이 개관되었다.

2003
뉴욕에서 뇌일혈로 쓰러져 투병생활을 하였다.

2006
갤러리 현대에서 미공개작과 대표작을 모아 개인전을 열었다. 자서전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랜덤하우스코리아)와 재출간 되었고 그림 에세이집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랜덤하우스코리아)가 발간 되었다. 천경자 평전 <천경자의 환상여행>(정중헌, 나무와 숲)이 출간 되었다.

2015
8월6일 뉴욕에서 타계했다. 사망 소식이 뒤늦게 알려져 10월30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추모식이 열렸다. <미인도>위작 논란에 다시 세인의 관심이 집중됐다.

2016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주기 추모전. 2월14일 <미인도> 위작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SBS스페셜-소문과 거짓말’이 방영되었다. 천경자 평전 <찬란한 고독, 한의 미학>(최광진, 미술문화)이 출간되었다. 6월 서울시립미술관에서 1주기 추모전이 열렸다. 두 달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총 10만여명이 관람하였다.